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덕로(德老). 아버지는 훈련원판관 대유(大有), 어머니는 감찰 오세훈(吳世勳)의 딸이다. 그는 용력이 뛰어나 천수(千壽), 백수(百壽), 구수(九壽)의 세 아우들과 함께 용맹으로 널리 알려졌다. 1584년(선조 17) 무과에 급제하고 감찰,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 풍천부사(豊川府使)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실직(失職)으로 봉산 향제(鄕第)에 있다가 분연히 일어나, 세 아우, 그리고 진사 최섭(崔涉), 이옹(李○)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9백인을 모으고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세 아우를 선봉장으로 삼고, 급히 장단(長湍)으로 나아가 조방장 유극량(劉克良)과 합병하여 임진강 방어전에 참가하였는데, 백수는 조방장과 함께 파주 싸움에서 전사했다. 두 아우와 함께 흩어진 군졸들을 모아 다시 봉산으로 돌아와 의거할 준비를 하며 오위도총부도사 인 아들 광협(光鋏)과 함께 황해도 여러 읍의 적정을 탐문하였다. 민심을 진정시키려는 순찰사 이일(李鎰)에 의해 임시로 봉산군수에 임명됨으로써 안정을 찾게 되었고, 이어 여러 군병(郡兵)과 합세하여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의병장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선전관에 임명되어 부차전투(富車戰鬪)에서 3전 3승을 거두었으나 아들 광협을 잃었다. 1593년 진도군수가 되어 한산도에 진을 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군대와 광주(光州)에 진을 친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의 군대에 군량미를 보급하는 데 공헌하였다. 난 중의 공적이 참작되어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봉산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장양(莊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