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때의 의병장. 희열(希說) 이라고도 한다. 부사 우복(遇福)의 아들이다. 전라도 순천 출신의 무사로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인 희복(熙復)과 더불어 창의하여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금산전투에 참전하여 패배하자, 잠시 향리인 순천으로 돌아갔다. 다시 의병 2백여명을 모집, 훈련시켜 비(飛)자를 군표(軍標)로 삼고 남원을 공격하였으며, 1593년 6월 진주성을 왜군이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여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끝까지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해지고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자 적진으로 돌격,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봉사(奉事)에 추증되고, 진주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