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종의 장남. 이름은 제(禔), 자는 후백(厚伯).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제(霽)의 딸이며, 부인은 광주김씨(光州金氏)로 한로(漢老)의 딸이다.
1404년(태종 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이라든가, 혹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 그리고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대하여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한다든가 하는 자유분방한 풍류생활을 더 즐겼다. 이와같은 그의 품행은 부왕인 태종의 눈에도 걱정스럽게 비쳤음은 물론, 엄격한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수차에 걸쳐 그에게 군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행을 닦도록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심한 벌을 주기도 하였으나, 그는 끝내 그런 부왕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1418년에 유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그의 동생이며, 뒷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 그런데 그가 왜 그러한 파격적인 행동을 하였으며, 또한 왜 세자의 지위를 잃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그의 동생인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세종과 극히 우애가 깊었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과거의 왕세자였다는 것, 현왕이 그의 동생이라는 것 때문에 그의 일거일동은 세밀한 관찰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된 바 있었지만,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이러한 그의 특이한 생애는 많은 후세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듯하며, 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지는 것이 적지 않다. 특히 시와 서에 능하였다.
1404년(태종 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이라든가, 혹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 그리고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대하여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한다든가 하는 자유분방한 풍류생활을 더 즐겼다. 이와같은 그의 품행은 부왕인 태종의 눈에도 걱정스럽게 비쳤음은 물론, 엄격한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수차에 걸쳐 그에게 군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행을 닦도록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심한 벌을 주기도 하였으나, 그는 끝내 그런 부왕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1418년에 유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그의 동생이며, 뒷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 그런데 그가 왜 그러한 파격적인 행동을 하였으며, 또한 왜 세자의 지위를 잃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그의 동생인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세종과 극히 우애가 깊었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과거의 왕세자였다는 것, 현왕이 그의 동생이라는 것 때문에 그의 일거일동은 세밀한 관찰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된 바 있었지만,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이러한 그의 특이한 생애는 많은 후세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듯하며, 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지는 것이 적지 않다. 특히 시와 서에 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