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증조부. 이름은 행리(行里). 덕원 출신. 아버지는 목조(穆祖: 安社)이며, 어머니는 평창이씨(平昌李氏)로 천우위(千牛衛) 숙(肅)의 딸이다. 1394년(태조 3) 4대조를 추존할 때 생각하는 바가 심원하다 하여 익왕(翼王) 으로, 다시 태종 때 익조로 추존하였다. 1275년(충렬왕 1)에 아버지로부터 천호 및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직을 그대로 세습하였다. 그가 오동(斡東)에서 세력을 다지고 있는 동안 원나라의 세조는 일본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원나라의 명령을 받고 본소(本所)의 군인을 선발하여 원정군에 협력하였다.이 무렵 그가 충렬왕을 알현한 기사가 '고려사'에 실려 있다. 그는 엄연히 원나라의 신하가 된 역신임에도 충렬왕은 그를 옛날의 신하로 온건하게 대하였고, 그도 충렬왕에게 고려를 배반한 과죄를 용서해줄 것을 빌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오동에 거주하면서 안변, 화주, 함주 에도 자주 내왕하여 활동영역을 넓혔다. 1300년에 원나라 로부터 승사랑의 산계(散階)를 받게 된 것은 부원세력으로서의 확고한 지반을 닦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아버지 안사 때와는 달리 여진 인과 마찰을 빚었으니, 그것은 이때 원나라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원장(元將) 산길(散吉)의 영향력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여진 인들은 기성(崎城: 용비어천가에는 하관성=奚關城으로 보임.)을 정찰하는 도중에 그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재빨리 이곳을 탈출하여 두만강 하류의 적도(赤島)로 피하여 화를 면하였다. 오동의 주민이 또 이곳으로 옮겨와서 한동안 같이 살다가 직도(稷島), 추도(楸島), 초도(草島)의 재목으로 배 10척을 만들어 뱃길로 연고지인 의주로 다시 옮겨와서 살다가 죽었다. 능은 지릉(智陵)으로 안변 서쪽 서곡현(瑞谷縣)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