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종실.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의 아들이다. 1387년에 산원(散員)이 되었고, 이어 낭장, 장군 등을 거쳐 원윤(元尹)이 되었으나, 1402년(태종 2)에 불미스런 여자문제로 인하여 순위부에 감금된 때도 있었다. 1412년에는 우군총제가 되었고, 그해에 삼군설치 이후에는 우일번절제사(右一番節制使)로 별사금제조(別司禁提調)를 겸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병마사가 되었는데 적서와 존비, 귀천의 구별없이 왕족이라는 특혜로 내린 칙서로 불평을 사기도 하였다. 1414년 도총제로 있을 때 진하사(進賀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7년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거쳐 이듬해는 좌군도총제로 태종 때를 끝내고, 세종 때에는 중군도총제를 거쳐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를 역임하였다. 이어 다시 중군도총제로서 절일사(節日使)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에 다녀온 뒤 유후사(留侯司)로 개성을 거쳐, 황주, 평양 등지의 선위사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1429년(세종 11) 판좌군부사(判左軍府事)가 되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도중에 노루사냥을 한 죄로 외방으로 쫓겨났다가 1431년에 직첩을 다시 받고, 그해에 판우군부사가 되었다. 이어 판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435년에 죽었다. 아버지가 서출이기는 하나 종친인 관계로 최우대를 받으면서 무관의 수뇌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시호는 양정(良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