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왕족. 자는 경숙(敬叔). 호는 담은당(湛恩堂). 선조(宣祖)의 제5남인 정원군(定遠君)의 아들. 인조(仁祖)의 동생. 모친은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이고, 부인은 문화유씨(文化柳氏) 유효립(柳孝立)의 딸이다.
11세에 선조의 왕자이자 큰아버지인 의안군(義安君) 이성(李珹)의 계자(繼子)로 출계(出系)하여 능원군(綾原君)에 봉해졌다. 1626년(인조 4)에 계운궁(啓運宮) 구씨가 죽자 주상(主喪)으로 일을 맡았고, 1631년(인조 9)에 능원대군(綾原大君)으로 진봉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과 세자, 백관들과 더불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는데, 각 지방의 근왕병도 모두 패배하여 남한산성에서 고립되는 상황에 이르자 성내에는 강화(講和)를 주장하는 자의 수가 점차 늘어갔다. 이때 이성은 예조판조 김상헌(金尙憲)과 뜻과 같이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말하기를 '군신 부자가 응당 각기 충의를 다하여 종묘사직을 위해 성을 등지고 결사(決死)하여야 할 것이다.'하니 듣는 사람들이 늠연하였다. 이후 일체 조정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모든 글월에는 그대로 명나라 연호를 쓰는 등 청 조정에 대항하여 절의를 지켰다.
효종 초에 종실로서 궁궐에 나아가 추종하는 자가 많아지자 도리어 차자(箚子)를 올려 이들을 죄 줄 것을 청하면서 '법을 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친귀(親貴)한 자로부터 엄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사신이 왕래할 때에도 비록 비복일지라도 엿보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무릇 고명(誥命)에 또한 위호(僞號)를 쓰지 않았다. 성품이 온순하면서도 맑고 곧았고, 성색(聲色)과 화리(貨利)는 일체 경영하지 않은 등 건실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종실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효종이 친히 조상(弔喪)하였다고 한다.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묘는 남양주(南楊州) 화도읍(和道邑) 녹촌리에 있다.
11세에 선조의 왕자이자 큰아버지인 의안군(義安君) 이성(李珹)의 계자(繼子)로 출계(出系)하여 능원군(綾原君)에 봉해졌다. 1626년(인조 4)에 계운궁(啓運宮) 구씨가 죽자 주상(主喪)으로 일을 맡았고, 1631년(인조 9)에 능원대군(綾原大君)으로 진봉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과 세자, 백관들과 더불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는데, 각 지방의 근왕병도 모두 패배하여 남한산성에서 고립되는 상황에 이르자 성내에는 강화(講和)를 주장하는 자의 수가 점차 늘어갔다. 이때 이성은 예조판조 김상헌(金尙憲)과 뜻과 같이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말하기를 '군신 부자가 응당 각기 충의를 다하여 종묘사직을 위해 성을 등지고 결사(決死)하여야 할 것이다.'하니 듣는 사람들이 늠연하였다. 이후 일체 조정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모든 글월에는 그대로 명나라 연호를 쓰는 등 청 조정에 대항하여 절의를 지켰다.
효종 초에 종실로서 궁궐에 나아가 추종하는 자가 많아지자 도리어 차자(箚子)를 올려 이들을 죄 줄 것을 청하면서 '법을 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친귀(親貴)한 자로부터 엄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사신이 왕래할 때에도 비록 비복일지라도 엿보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무릇 고명(誥命)에 또한 위호(僞號)를 쓰지 않았다. 성품이 온순하면서도 맑고 곧았고, 성색(聲色)과 화리(貨利)는 일체 경영하지 않은 등 건실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종실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효종이 친히 조상(弔喪)하였다고 한다.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묘는 남양주(南楊州) 화도읍(和道邑) 녹촌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