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종실. 자는 장중(藏仲). 호는 기천(杞泉). 선조의 여덟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김한우(金漢佑)의 딸인 인빈(仁嬪) 김씨이다. 9세에 봉작되었으며 15세에 이조판서(吏曹判書) 허성(許筬)의 딸과 혼인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려, 파천하는 어가에 동행하지 못하고 보모와 함께 민가에 피신하였다. 후에 행재소(行在所)로 몸을 옮겨, 어가와 함께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선조가 친히 '소학(小學)'과 '논어(論語)'를 가르치고, 집을 지을 때도 내탕금(內帑金)을 내어 도움을 줄 정도로 그를 아꼈다고 한다.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廢母論)을 주창하자, 이에 끝까지 동조하지 않았다. 장인인 허성의 배다른 동생이 허균(許筠) 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훗날 그와 함께 역모에 연루되어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부인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호가(扈駕)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있으면서 인조를 도왔으며, 일찍이 종부시(宗簿寺)와 사옹원(司饔院)의 도제조(都提調)를 겸하였다. 팔법(八法)에 능하여 필력이 웅건하였으며, 특히 큰 글자를 잘 써, 당시 편액(扁額)과 금석(金石)의 각(刻)은 이광의 것을 받아 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전한다. 흩어져 있던 아버지 선조의 친필을 모아, 손수 모사하여 침각(○刻)해 보전에 힘쓰기도 하였다.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양주(楊洲) 풍양리(豊壤里) 자좌 오향(子坐午向)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