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왕족.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의 증손자이며, 이산부정(伊山副正) 이사성(李嗣盛)의 셋째아들이다. 어머니는 홍주송씨(洪州宋氏) 별시위(別侍衛) 송평(宋枰)의 딸이다. 자는 계숙(繼叔). 한양 출신.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23세 때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26세 되던 해 형 하원수(河源守) 이찬(李纘)이 이과(李顆)와 함께 견성군(甄城君) 이돈(李惇)을 추대, 모반하려 한다고 노영손(盧永孫)이 밀고, 기옥(起獄)되어 맏형 진성수(珍城守) 이면(李綿)은 경상도 초계(草溪)로, 그는 전라도 명양현(鳴陽縣)으로 정배되었다.
39세 때 정배된 지 14년 만에 귀양에서 풀렸으나 귀경을 단념하고 담양 대곡(大谷)에 은거하여 의리학(義理學)의 서적에 침잠하는 한편, 자손과 후진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중장통(仲長統)의 '낙지론(樂志論)'을 탐독하며 안빈낙도의 생활을 누리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뒤에 추성수(秋城守)에 봉하여졌다.
어려서부터 풍채가 당당하였으며 시재(詩才), 필력(筆力) 또한 뛰어나 그의 '몽한시(夢漢詩)'를 '옥루수조지사(玉樓水調之詞)'로, 그의 필치를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의 필격에 견주기도 하였다. 귀양에서 풀린 뒤 한양으로 돌아갔으면 영화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나 이를 거부하고 담양에 머물러 은거생활을 한 것은 속된 입신양명이나 부귀영달에 초연한 그의 고고한 인품을 말해주고 있다. 유작으로 '몽한시' 1수와 '낙지가(樂志歌)' 1편이 '몽한영고(夢漢零稿)'에 실려 있다.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23세 때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26세 되던 해 형 하원수(河源守) 이찬(李纘)이 이과(李顆)와 함께 견성군(甄城君) 이돈(李惇)을 추대, 모반하려 한다고 노영손(盧永孫)이 밀고, 기옥(起獄)되어 맏형 진성수(珍城守) 이면(李綿)은 경상도 초계(草溪)로, 그는 전라도 명양현(鳴陽縣)으로 정배되었다.
39세 때 정배된 지 14년 만에 귀양에서 풀렸으나 귀경을 단념하고 담양 대곡(大谷)에 은거하여 의리학(義理學)의 서적에 침잠하는 한편, 자손과 후진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중장통(仲長統)의 '낙지론(樂志論)'을 탐독하며 안빈낙도의 생활을 누리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뒤에 추성수(秋城守)에 봉하여졌다.
어려서부터 풍채가 당당하였으며 시재(詩才), 필력(筆力) 또한 뛰어나 그의 '몽한시(夢漢詩)'를 '옥루수조지사(玉樓水調之詞)'로, 그의 필치를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의 필격에 견주기도 하였다. 귀양에서 풀린 뒤 한양으로 돌아갔으면 영화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나 이를 거부하고 담양에 머물러 은거생활을 한 것은 속된 입신양명이나 부귀영달에 초연한 그의 고고한 인품을 말해주고 있다. 유작으로 '몽한시' 1수와 '낙지가(樂志歌)' 1편이 '몽한영고(夢漢零稿)'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