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종의 4세손. 아버지는 풍산군(豊山君) 종린(宗○), 어머니는 광주목사(廣州牧使) 박간(朴諫)의 딸, 부인은 사도시첨정 정인수(鄭○壽)의 딸이다. 1583년 보신대부구천부정(保身大夫龜川副正)에 예수(例授)되고, 1592년 의주로 몽진한 선조를 배종한 뒤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며, 1594년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1604년 학행이 있는 종친이라고 뽑혀 전란으로 흩어진 선록(璿錄)을 정리하는데 참여한 뒤, 그 공으로 명선대부구천부정(明善大夫龜川副正)에 올랐다. 1613년(광해군 5) 정의대부에 오르면서 구천군에 책봉되었고, 1614년 임진왜란 때 호종한 공으로 중의대부에 올랐으며, 이듬해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를 겸하였다. 1617년 윤선도(尹善道)가 이이첨(李爾瞻)을 공격하는 분란이 일어났을 때, 금성군(錦城君) 성윤(誠胤) 등과 상소하여 이이첨을 배척하고 윤선도를 옹호하다가 순천으로 유배되었으나 1621년에 풀려났다. 1623년 인조의 즉위와 함께 관작이 복구되고, 특별히 숭덕대부에 오르면서는 사옹원제조를 겸하고 종친부도 관장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으로 공주에 몽진한 인조를 시종하여 그 공으로 가덕대부에 올랐다. 1627년 후금의 침입으로 강화도에 몽진한 인조를 또다시 시종하고,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어 군정을 지휘하였다. 그뒤 인조의 총애가 계속되었다. 죽은 뒤에 현록대부가 추증되었다. 이름은 수, 자는 명원(明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