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종친. 자는 현지(顯之). 부친은 세종이고, 모친은 신빈(愼嬪) 김씨(金氏)이다. 부인은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에 계양군(桂陽君)으로 봉해졌다.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였으며 성품이 온화하고 영매(英邁)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썼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한 후에 한명회(韓明澮), 한확(韓確) 등과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측근이 되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도왔다. 1455년에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左翼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다. 세조의 측근에서 서무의 출납을 맡아 신임을 얻었다. 남을 대접함이 겸손하여 권세를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종실의 신망을 얻었으나 주색을 즐겨 1464년(세조 10)에 죽었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들은 영원군(寧原君) 이예(李澧), 부림군(富林君) 이식(李湜), 강양군(江陽君) 이숙(李潚)이다. 그 중에 강양군은 담양군(潭陽君) 이거(李渠)의 계자(系子)가 되었다. 묘는 남양주(南楊州) 일패동 논골에 있다.
1434년(세종 16)에 계양군(桂陽君)으로 봉해졌다.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였으며 성품이 온화하고 영매(英邁)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썼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한 후에 한명회(韓明澮), 한확(韓確) 등과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측근이 되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도왔다. 1455년에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左翼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다. 세조의 측근에서 서무의 출납을 맡아 신임을 얻었다. 남을 대접함이 겸손하여 권세를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종실의 신망을 얻었으나 주색을 즐겨 1464년(세조 10)에 죽었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들은 영원군(寧原君) 이예(李澧), 부림군(富林君) 이식(李湜), 강양군(江陽君) 이숙(李潚)이다. 그 중에 강양군은 담양군(潭陽君) 이거(李渠)의 계자(系子)가 되었다. 묘는 남양주(南楊州) 일패동 논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