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종친. 자는 의지(艤之). 정종의 4세손으로 아버지는 백성수(栢城守) 증백성군(贈栢城君) 이수원(李守源)이며, 어머니는 인순부부승(仁順府副丞) 송휘(宋○)의 딸이다. 민호(閔灝)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1525년(중종 20) 신유식년문과(辛酉式年文科)에 병과 15등으로 급제하여 사서(司書)가 된 이원경(李元卿)이 그의 아들이다. 1483년(성종 14) 계원부수(桂原副守)에 봉해졌으며, 1502년(연산군 8) 종친시예(宗親試藝)에 장원하여 종친부(宗親府)의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 인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오르고 1506년(중종 1)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제수되고, 1516년(중종 11) 계원도정(桂原都正)에 승진되었다. 1530년(중종 25) 정현왕후(貞顯王后)의 국장 후 학행이 있다하여 시릉종친(侍陵宗親)이 되었고, 이 노고로 정의대부에 오르면서 1531년(중종 26) 계원군(桂原君)에 진봉되었다. 1542년(중종 37) 연로 종친이라 하여 중의대부(中義大夫)에 승자되었다. 어려서부터 문장보다는 성리학(性理學)에 침잠(沈潛)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므로 문도가 2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는 당대의 진신(搢紳)으로 현저한 자들도 많아 종실(宗室) 중 특이한 인물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묘소는 고양시(高陽市) 구이동(九耳洞: 현재 城石洞) 오야곡(梧野谷)에 있으며, 신도비는 1582년(선조 15)에 세운 것으로 '장민공신도비명(長敏公神道碑銘)'이라는 전자(篆字)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