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3대왕인 순조의 세자(世子). 헌종(憲宗)의 아버지. 이름은 이영(李昊 : 원래의 음은 대이나 영으로 부르도록 정함), 자는 덕인(德寅), 호는 경헌(敬軒). 어머니는 순원왕후김씨(純元王后金氏)로 김조순(金祖淳)의 딸이다. 1812년(순조 12)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趙萬永)의 딸인 풍양조씨(豊壤趙氏)를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성균관에 입학하고(8세. 1817년 3월 11일) 관례(冠禮- 성년식)를 거행했다(10세. 1819년 3월 20일).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세자의 순조로운 과정이었다.
1819년 10월 11일 세자는 부사직(副司直. 종5품 무반) 조만영(趙萬永. 1776~1846)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 뒤에 신정왕후(神貞, 1808~1890)로 책봉된 그녀는 요절한 효명세자와 달리 82세까지 장수하면서 흥선군(興宣君)의 둘째 아들인 고종에게 왕위를 승계시키고(1863년 12월 8일) 3년 동안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등 뚜렷한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다.
1827년(순조 27년) 부왕인 순조의 명령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어진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동시에 모든 백성을 위하는 정책의 구현에 노력하였으나 불행히도 대리청정을 수행한 지 4년 만에 죽고 말았다.
이전에도 수두(3세. 1812년 10월 18일)와 홍역(13세. 1822년 11월 24일)을 앓았다는 기록은 있지만 순조롭게 왕자를 낳는 등(1827년 7월 18일 헌종 출생) 건강에는 큰 지장이 없어 보였지만, 1830년(순조 30) 윤4월 말에 각혈한 뒤 며칠 만에 승하한 것이다(5월 6일). 왕실 중흥의 기대를 무산시킨 허망한 결과였다.
국혼에서 핵심적인 사항은 이것을 계기로 풍양조씨가 세도정치의 한 주역으로 발돋움했다는 것이었다. 세자빈인 조씨 일족들이 그뒤 대거 진출하여 안동김씨(安東金氏) 일파와의 정치적 세력투쟁이 시작되어 정국을 혼란상태로 이끌어갔고, 이와같은 사실은 지배층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켜 조선 후기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놓음으로써 민생을 도탄상태에 몰아넣고 말았다.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 후 왕에 추존(追尊)되어 익종(翼宗)을 거쳐 문조(文祖) 익황제(翼皇帝)로 추존되었다. 묘호는 문호(文祜),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에 있는 수릉(綏陵)이며, 시호는 효명(孝明)이다.
성균관에 입학하고(8세. 1817년 3월 11일) 관례(冠禮- 성년식)를 거행했다(10세. 1819년 3월 20일).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세자의 순조로운 과정이었다.
1819년 10월 11일 세자는 부사직(副司直. 종5품 무반) 조만영(趙萬永. 1776~1846)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 뒤에 신정왕후(神貞, 1808~1890)로 책봉된 그녀는 요절한 효명세자와 달리 82세까지 장수하면서 흥선군(興宣君)의 둘째 아들인 고종에게 왕위를 승계시키고(1863년 12월 8일) 3년 동안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등 뚜렷한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다.
1827년(순조 27년) 부왕인 순조의 명령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어진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동시에 모든 백성을 위하는 정책의 구현에 노력하였으나 불행히도 대리청정을 수행한 지 4년 만에 죽고 말았다.
이전에도 수두(3세. 1812년 10월 18일)와 홍역(13세. 1822년 11월 24일)을 앓았다는 기록은 있지만 순조롭게 왕자를 낳는 등(1827년 7월 18일 헌종 출생) 건강에는 큰 지장이 없어 보였지만, 1830년(순조 30) 윤4월 말에 각혈한 뒤 며칠 만에 승하한 것이다(5월 6일). 왕실 중흥의 기대를 무산시킨 허망한 결과였다.
국혼에서 핵심적인 사항은 이것을 계기로 풍양조씨가 세도정치의 한 주역으로 발돋움했다는 것이었다. 세자빈인 조씨 일족들이 그뒤 대거 진출하여 안동김씨(安東金氏) 일파와의 정치적 세력투쟁이 시작되어 정국을 혼란상태로 이끌어갔고, 이와같은 사실은 지배층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켜 조선 후기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놓음으로써 민생을 도탄상태에 몰아넣고 말았다.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 후 왕에 추존(追尊)되어 익종(翼宗)을 거쳐 문조(文祖) 익황제(翼皇帝)로 추존되었다. 묘호는 문호(文祜),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에 있는 수릉(綏陵)이며, 시호는 효명(孝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