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 전주이씨(全州李氏),  출생~사망 : 1877 ~ 1955
조선 말기의 왕족.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호는 만오(晩悟). 의왕(義王), 의친왕(義親王) 또는 의화군(義和君) 이라고도 불린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장씨(貴人張氏)이다. 1891년(고종 28) 12월 의화군에 봉하여졌으며, 1893년 9월 김사준(金思濬)의 딸을 맞아 가례(嘉禮)를 올렸다.

1894년 9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전승을 축하하는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임명되어 일본에 갔다가 그해 10월에 귀국하였다. 1895년 5월에는 특파대사에 임명되었으며, 같은해 8월에는 특파대사자격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1900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국대학교 특별과에 입학하였으며, 같은해 8월에 의왕으로 봉하여졌다. 1905년 4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그해 6월에 적십자사총재가 되었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항일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도중 그해 11월 의친왕은 밤중을 이용하여 인사동(仁寺洞) 궁궐을 빠져 나와 세검정(洗劍亭)에서 정남용(鄭南用)과 상의한 끝에 상복 차림을 하고, 정남용을 동반하여 상하이를 향해 출발, 3등 차편으로 만주 안둥현(安東縣)까지 갔으나 일본경찰에게 발각당하여 강제로 서울로 송환되었다. 그뒤 여러 차례 일본정부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거부하여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일제에 의해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공족에서 강제로 물러났으며,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의친왕은 이후 광인과 주색에 빠진 것을 가장하여 일제의 감시의 눈을 피해 살았다. 1940년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11월 3일 임정 요인들이 환국, 김구·김규식 등과 면담하였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그는 별다른 정치적 의사표현은 삼갔다. 그 후 사동궁 별궁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나 황족으로서의 어떠한 예우도 없는 조건이 붙었다.

1955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의 별궁에서 영양실조 후유증과 스트레스(화병) 등의 합병증으로 79살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군 금곡동의 홍유릉 내에 위치한 의친왕묘(義親王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