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황후. 정식 시호는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儀慈仁純貞孝皇后)이다. 박영효, 이재각 등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 인사인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딸이다. 1894년 9월 19일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서 출생하였다. 순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다.
황태자비 민씨(閔氏)가 1904년에 사망하자, 1906년 12월 13세에 황태자비로 택봉되었고, 이듬해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당시의 자자한 소문에는 택영이 엄비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쳐서 간택되었다고 한다. 순종의 동생 영친왕(英親王)은 고종의 제7자로 황귀비엄씨(皇貴妃嚴氏)의 출생인데, 순종이 즉위하자 엄비와 이토(伊藤博文) 등의 중론에 따라 황태자로 책립하였는바 당시 세론은 형제로 계통(繼統)을 세움이 불가하다 하면서 황태제(皇太弟)라 하였다. 1907년에 여학(女學)에 입학하여 황후궁에 여시강(女侍講)을 두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므로, 황비가 이를 저지하고자 치마 속에 옥새(玉璽)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숙부인 윤덕영(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다.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됐으므로 그녀도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 머물렀으며 1926년 4월, 순종이 붕어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昌德宮)의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겼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창덕궁에 남아 황실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궁궐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는 조선인민군을 당시 5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순정효황후는 두려움을 모르는 여걸(女傑)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1년 대한민국의 전세가 급박해지자 미군에 의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궁핍한 생활을 전전하던 끝에 1953년 한국휴전협정으로 전쟁이 중단되자 바로 환궁하려 하였으나, 제1공화국의 이승만이 순정효황후에 대한 민심을 두려워하여 환궁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정릉의 수인제(修仁齊)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1959년에는 비구니로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얻었고, 이듬해 1960년, 전(前) 구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吳在璟)의 노력으로 환궁에 성공하였고,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 및 의민태자 일가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며 독서와 피아노 연주로 소일하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온화한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던 순정효황후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냉철함으로 황실을 이끌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평생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 실력은 타임지를 읽어낼 정도였다고 전한다. 1966년 2월 3일, 창덕궁 석복헌(錫福軒)에서 심장마비로 73살의 나이에 불우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황태자비 민씨(閔氏)가 1904년에 사망하자, 1906년 12월 13세에 황태자비로 택봉되었고, 이듬해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당시의 자자한 소문에는 택영이 엄비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쳐서 간택되었다고 한다. 순종의 동생 영친왕(英親王)은 고종의 제7자로 황귀비엄씨(皇貴妃嚴氏)의 출생인데, 순종이 즉위하자 엄비와 이토(伊藤博文) 등의 중론에 따라 황태자로 책립하였는바 당시 세론은 형제로 계통(繼統)을 세움이 불가하다 하면서 황태제(皇太弟)라 하였다. 1907년에 여학(女學)에 입학하여 황후궁에 여시강(女侍講)을 두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므로, 황비가 이를 저지하고자 치마 속에 옥새(玉璽)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숙부인 윤덕영(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다.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됐으므로 그녀도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 머물렀으며 1926년 4월, 순종이 붕어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昌德宮)의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겼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창덕궁에 남아 황실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궁궐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는 조선인민군을 당시 5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순정효황후는 두려움을 모르는 여걸(女傑)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1년 대한민국의 전세가 급박해지자 미군에 의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궁핍한 생활을 전전하던 끝에 1953년 한국휴전협정으로 전쟁이 중단되자 바로 환궁하려 하였으나, 제1공화국의 이승만이 순정효황후에 대한 민심을 두려워하여 환궁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정릉의 수인제(修仁齊)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1959년에는 비구니로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얻었고, 이듬해 1960년, 전(前) 구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吳在璟)의 노력으로 환궁에 성공하였고,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 및 의민태자 일가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며 독서와 피아노 연주로 소일하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온화한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던 순정효황후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냉철함으로 황실을 이끌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평생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 실력은 타임지를 읽어낼 정도였다고 전한다. 1966년 2월 3일, 창덕궁 석복헌(錫福軒)에서 심장마비로 73살의 나이에 불우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