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시인. 자는 숙장(叔章). 호는 사명자(四名子). 천로(天輅)의 6대손으로, 윤태(潤泰)의 아들이다. 어머니 백씨(白氏)가 그를 잉태하였을 때 하지장(賀知章)을 꿈에 보아 그의 자와 호를 따라 지었다 한다. 하지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소식(蘇軾)의 흔적도 많다.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서화나 음률, 사예(射藝)에도 뛰어났으나, 특히 시를 잘하였다. 당대의 문장가였던 홍양호(洪良浩), 윤행임(尹行恁), 윤사국(尹師國), 정약용(丁若鏞) 등이 자리를 함께 하여 시를 지을 정도였다. 그러나 재주는 뛰어나지만 관직이 한미하여 만년에 만호(萬戶) 라는 무관말직(武官末職)에 머물렀던만큼 세상에 대한 불평의 뜻이 많았다. '살아서는 취향백(醉鄕伯), 죽어서는 수문랑(修文郞)'이라는 그의 시는 시주(詩酒)에 경도되었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주며, 세세생생(世世生生)이 나라에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하소연은 제도에 대한 불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동생과 두 아들이 죽은 뒤 더욱 시주에 탐닉하고 방약무인하였다. 천수경(千壽慶), 장혼(張混), 왕태(王太), 최북(崔北)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결성하여 비분과 고뇌를 시로 풀었다. 그의 시는 유재건(柳在建)이 편한 '풍요삼선 風謠三選'과 일본인 아오야마(靑山好惠)가 편한 '명가시집 名家詩集' 에도 실려 있으며, 시집으로는 '사명자시집'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