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시인.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김치(金緻)이며, 어머니는 사천목씨(泗川睦氏)로 목첨(睦詹)의 딸이고, 아내는 경주김씨이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를 받아 서서히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당시 한문 사대가인 이식(李植) 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부할 때에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는 데 치력하였는데, 그 중 '백이전 伯夷傳'은 억번이나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하였다. 저술이 병자호란 때 많이 타 없어졌으나, 문집인 '백곡집'에는 많은 글들이 전하고 있다. 그 중 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문보다는 시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오언, 칠언절구를 잘 지었다. '용호 龍湖', '구정 龜亭', '전가 田家' 등은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시를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시를 보는 안목도 높아, '종남총지 終南叢志' 같은 시화도 남겼다. 이에는 어무적(魚無迹), 이행(李荇), 정사룡(鄭士龍), 정철(鄭澈), 권필(權○) 같은 앞 세대 유명시인 등과 남용익(南龍翼), 김석주(金錫胄), 홍만종(洪萬宗) 같은 당대 문사들의 시를 뽑아, 거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비평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 歡伯將軍傳'과 '청풍선생전 淸風先生傳'을 남기기도 했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를 받아 서서히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당시 한문 사대가인 이식(李植) 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부할 때에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는 데 치력하였는데, 그 중 '백이전 伯夷傳'은 억번이나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하였다. 저술이 병자호란 때 많이 타 없어졌으나, 문집인 '백곡집'에는 많은 글들이 전하고 있다. 그 중 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문보다는 시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오언, 칠언절구를 잘 지었다. '용호 龍湖', '구정 龜亭', '전가 田家' 등은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시를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시를 보는 안목도 높아, '종남총지 終南叢志' 같은 시화도 남겼다. 이에는 어무적(魚無迹), 이행(李荇), 정사룡(鄭士龍), 정철(鄭澈), 권필(權○) 같은 앞 세대 유명시인 등과 남용익(南龍翼), 김석주(金錫胄), 홍만종(洪萬宗) 같은 당대 문사들의 시를 뽑아, 거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비평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 歡伯將軍傳'과 '청풍선생전 淸風先生傳'을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