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고승(高僧). 밀양박씨(密陽朴氏). 자는 이식(耳食). 호는 묵암(默庵). 흥양현(興陽縣) 장사촌(長沙村) 출신.
1. 유년시절 및 수행과정
4세 때 부모를 따라 낙읍(樂邑) 응계촌(鷹鷄村)으로 옮겨 살았다. 어려서부터 땅에 떨어진 글 쓴 종이만 보면 곧 주워서 벽에 붙여놓고 '내가이 뒤에 배울 것이다.' 할 만큼 배움에 대한 욕망이 강하였다. 14세에 징광사(澄光寺)로 출가하여 돈정(頓淨)의 제자가 되었고 18세에 만리(萬里) 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9세에 조계산 송광사(松廣寺)에 들어가 풍암(楓巖) 에게서 경전을 배우기 시작하여 4, 5년 만에 스승의 가르침을 다 배워 마쳤다. 그뒤 호암(虎巖), 회암(晦庵), 용담(龍潭), 상월(霜月) 등 당대의 여러 고승들을 역참(歷參)하면서 불도(佛道)를 더욱 닦아 익혔고, 명진(明進) 아래에서 선지(禪旨)를 깨쳐 얻었으며, 영해(影海) 밑에서 도를 더욱 깊이 갈고 닦았다. 1743년(영조 19) 풍암이 거처하는 순천 대광사(大光寺) 영천암(靈天庵)으로 돌아가자, 풍암은 그의 인품을 인정하여 자신의 의발(衣鉢)을 전하였다. 그뒤 강석(講席)을 열어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2. 불교관
그의 행장에 의하면 이때 강설한 법문들이 모두 저술로 엮어져 10여종이 되었다 하나 현재는 3종만이 남아 있다. 1749년 금강산에서 머물렀고, 1760년 영해의 비를 징광사에 세웠으며, 1761년 송광사에 영해의 비를 세워 스승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였다. 1770년 봄 표충사 원장으로 부임하였고, 1790년 조계산 보조암(普照庵)에서 나이 73세, 법랍(法臘) 55세로 입적(入寂)하였다. 그는 천성이 뛰어나게 총명하였고 쉬지 않고 부지런히 도를 구하였으며 연구하기를 좋아하여 삼장(三藏)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고금의 서적과 시서(詩書) 등 백가(百家)에 두루 통달하였다. 그러나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도량(道場)에서 대회를 열지 못하였고, 그 기량을 발현시키지 못하였다. 그리고 음양오행의 설을 유물론적으로 받아들여 바다의 조석(潮汐)을 그것으로 풀려 하였고, 또 산신(産神), 역신(疫神), 신신(身神), 명신(命神), 음양오행지신(陰陽五行之神) 등을 실재한다고 하고, 그것 때문에 자기의 몸이 약하다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생들과의 과감한 불교논쟁을 통하여 유선(儒禪)이 다를 바 없음을 주창하고 유생들의 배불(排佛)이 그릇된 것임을 인식시켰다. 또한, 왜승(倭僧)에게는 의연한 기백을 보여 사명대사 이후 제일가는 기백을 가진 승려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 교(敎)에는 '화엄경' 으로, 선(禪)에는 '선문염송(禪門拈頌)'으로 하였다. 그는 선학(禪學)에 미숙하였음을 스스로 술회하면서, '해탈과 공(空)을 부질없이 말하며 백년을 소모하다가, 잠에 빠져 깜깜한 속에 삼경이 지났구나. ' 하였지만 그가 남긴 선시(禪詩)들은 그의 높은 선지(禪旨)를 대변하고 있다. 그의 선시는 당시의 석학이요 대선사였던 연담(蓮潭)의 것과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
3. 법맥과 저술
법맥(法脈)은 선수(善修) ― 각성(覺性) ― 수초(守初) ― 성총(性聰) ― 수연(秀演) ― 약탄(若坦) ― 세찰(世察) ― 최눌로 이어진다. 또한, 많은 제자가 있었으나 선은 교평(敎萍) 에게, 그리고 교학(敎學)은 봉봉(鳳峯)과 성봉(聖峯) 등에게 전해졌다. 저술로는 '묵암집' 3권, '화엄과도(華嚴科圖)' 1권, '제경회요(諸經會要)' 1권, '내외잡저(內外雜著)' 10권, '심성론(心性論)' 3권 등이 있다. 이 중 '심성론'은 연담과 최눌이 일체 중생의 심성(心性)을 논함에 있어 여러 차례 논문으로 왕복한 것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러나 1775년 가을에 두 사람이 심성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최눌은 모든 부처님과 중생의 마음이 각각 원만하나 동일체(同一體)가 아니라고 주장한 데 대하여, 연담은 이와 반대로 각각 원만하지만 그 근원자리는 동일심체(同一心體)라고 주장하여 상반된 견해를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훗날 화일(華日), 경현(敬賢) 두 사람은 천은사(泉隱寺) 상선암(上禪庵)에서이 책이 후세 제자들의 쟁론의 화근이 될까를 염려하여 불태워버렸다. 이는 그의 높은 불교사상을 이해하는 데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1. 유년시절 및 수행과정
4세 때 부모를 따라 낙읍(樂邑) 응계촌(鷹鷄村)으로 옮겨 살았다. 어려서부터 땅에 떨어진 글 쓴 종이만 보면 곧 주워서 벽에 붙여놓고 '내가이 뒤에 배울 것이다.' 할 만큼 배움에 대한 욕망이 강하였다. 14세에 징광사(澄光寺)로 출가하여 돈정(頓淨)의 제자가 되었고 18세에 만리(萬里) 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9세에 조계산 송광사(松廣寺)에 들어가 풍암(楓巖) 에게서 경전을 배우기 시작하여 4, 5년 만에 스승의 가르침을 다 배워 마쳤다. 그뒤 호암(虎巖), 회암(晦庵), 용담(龍潭), 상월(霜月) 등 당대의 여러 고승들을 역참(歷參)하면서 불도(佛道)를 더욱 닦아 익혔고, 명진(明進) 아래에서 선지(禪旨)를 깨쳐 얻었으며, 영해(影海) 밑에서 도를 더욱 깊이 갈고 닦았다. 1743년(영조 19) 풍암이 거처하는 순천 대광사(大光寺) 영천암(靈天庵)으로 돌아가자, 풍암은 그의 인품을 인정하여 자신의 의발(衣鉢)을 전하였다. 그뒤 강석(講席)을 열어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2. 불교관
그의 행장에 의하면 이때 강설한 법문들이 모두 저술로 엮어져 10여종이 되었다 하나 현재는 3종만이 남아 있다. 1749년 금강산에서 머물렀고, 1760년 영해의 비를 징광사에 세웠으며, 1761년 송광사에 영해의 비를 세워 스승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였다. 1770년 봄 표충사 원장으로 부임하였고, 1790년 조계산 보조암(普照庵)에서 나이 73세, 법랍(法臘) 55세로 입적(入寂)하였다. 그는 천성이 뛰어나게 총명하였고 쉬지 않고 부지런히 도를 구하였으며 연구하기를 좋아하여 삼장(三藏)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고금의 서적과 시서(詩書) 등 백가(百家)에 두루 통달하였다. 그러나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도량(道場)에서 대회를 열지 못하였고, 그 기량을 발현시키지 못하였다. 그리고 음양오행의 설을 유물론적으로 받아들여 바다의 조석(潮汐)을 그것으로 풀려 하였고, 또 산신(産神), 역신(疫神), 신신(身神), 명신(命神), 음양오행지신(陰陽五行之神) 등을 실재한다고 하고, 그것 때문에 자기의 몸이 약하다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생들과의 과감한 불교논쟁을 통하여 유선(儒禪)이 다를 바 없음을 주창하고 유생들의 배불(排佛)이 그릇된 것임을 인식시켰다. 또한, 왜승(倭僧)에게는 의연한 기백을 보여 사명대사 이후 제일가는 기백을 가진 승려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 교(敎)에는 '화엄경' 으로, 선(禪)에는 '선문염송(禪門拈頌)'으로 하였다. 그는 선학(禪學)에 미숙하였음을 스스로 술회하면서, '해탈과 공(空)을 부질없이 말하며 백년을 소모하다가, 잠에 빠져 깜깜한 속에 삼경이 지났구나. ' 하였지만 그가 남긴 선시(禪詩)들은 그의 높은 선지(禪旨)를 대변하고 있다. 그의 선시는 당시의 석학이요 대선사였던 연담(蓮潭)의 것과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
3. 법맥과 저술
법맥(法脈)은 선수(善修) ― 각성(覺性) ― 수초(守初) ― 성총(性聰) ― 수연(秀演) ― 약탄(若坦) ― 세찰(世察) ― 최눌로 이어진다. 또한, 많은 제자가 있었으나 선은 교평(敎萍) 에게, 그리고 교학(敎學)은 봉봉(鳳峯)과 성봉(聖峯) 등에게 전해졌다. 저술로는 '묵암집' 3권, '화엄과도(華嚴科圖)' 1권, '제경회요(諸經會要)' 1권, '내외잡저(內外雜著)' 10권, '심성론(心性論)' 3권 등이 있다. 이 중 '심성론'은 연담과 최눌이 일체 중생의 심성(心性)을 논함에 있어 여러 차례 논문으로 왕복한 것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러나 1775년 가을에 두 사람이 심성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최눌은 모든 부처님과 중생의 마음이 각각 원만하나 동일체(同一體)가 아니라고 주장한 데 대하여, 연담은 이와 반대로 각각 원만하지만 그 근원자리는 동일심체(同一心體)라고 주장하여 상반된 견해를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훗날 화일(華日), 경현(敬賢) 두 사람은 천은사(泉隱寺) 상선암(上禪庵)에서이 책이 후세 제자들의 쟁론의 화근이 될까를 염려하여 불태워버렸다. 이는 그의 높은 불교사상을 이해하는 데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