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호는 존재(存齋). 대사성 성(宬)의 후손, 아버지는 혁. 정제두(鄭齊斗)의 문인이다. 171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된 후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고, 1721년(경종 1) 노론의 실각과 함께 외직으로 물러났다. 1731년(영조 7) 진주목사가 되었으며, 1735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어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1739년에는 승지가 되었고 회양부사, 부사직을 역임한 뒤, 1744년 '속대전'의 편찬에 그 찬집당상(纂輯堂上)으로 관여하였다. 이듬해 다시 승지가 되었으며, 관동심리사(關東審理使)로 다녀와 삼폐(蔘弊)를 논하고 그 대책을 진언하였다. 1746년 '속대전'의 교정당상으로 간행의 책임을 맡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거쳐 1748년 공조참판이 되었다. 그뒤 형조참판이 되어 전택(田宅)과 노비의 쟁송업무(爭訟業務)를 각각 한성부와 장예원에서 분담하도록 진언하였으며, '무원록 無寃錄'을 훈석(訓釋)하여 중간하는 일을 주관하였고, 1753년에는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초명은 명규(命奎), 자는 성오(性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