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호는 응와(凝窩). 형진(亨鎭)의 아들이며, 정언 규진(奎鎭)에게 입양되었다. 1809년(순조 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7년(헌종 3) 정언으로서 기강이 문란하여져 사족(士族)들의 사치가 극도에 달하였으며, 이와는 달리 계속된 흉년으로 민중들의 간고(艱苦)가 형언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음을 들어 쇄신책을 실시할 것을 극간하였다. 1850년(철종 1) 경주부윤에 오르고, 1854년 대사간에 이어 공조판서를 지냈다. 초명은 영조(永祚), 자는 주현(周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