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헌종의 국구(國舅). 자는 경견(景見). 공조판서 기섭(耆燮)의 아들이다.
1835년(헌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호군이 되고, 1839년에 한림소시(翰林召試)에서 선발된 뒤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그뒤 동부승지, 대사성, 병조, 이조의 참판, 금위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1844년 딸이 헌종의 계비 명헌왕후(明憲王后)로 책봉되자,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영돈령부사에 올랐다. 이어 어영대장, 총융사, 훈련대장을 번갈아 지냈으며, 1849년(철종 즉위년)에 실록청지사를 겸하여 '헌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1856년(철종 7) 화성유수로 잠시 머무르다가 다시 총융사, 훈련대장을 역임하였고, 1862년 광주유수(廣州留守)가 되었다가 이듬해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1835년(헌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호군이 되고, 1839년에 한림소시(翰林召試)에서 선발된 뒤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그뒤 동부승지, 대사성, 병조, 이조의 참판, 금위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1844년 딸이 헌종의 계비 명헌왕후(明憲王后)로 책봉되자,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영돈령부사에 올랐다. 이어 어영대장, 총융사, 훈련대장을 번갈아 지냈으며, 1849년(철종 즉위년)에 실록청지사를 겸하여 '헌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1856년(철종 7) 화성유수로 잠시 머무르다가 다시 총융사, 훈련대장을 역임하였고, 1862년 광주유수(廣州留守)가 되었다가 이듬해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익헌(翼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