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첨정 세교(世橋)의 손자이고, 증이조판서 태길(泰吉)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윤선적(尹宣績)의 딸이고, 지원(趾源)의 할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종숙부인 세채(世采) 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725년(영조 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729년 봉교가 되고, 1730년 정언이 되어서는 양조(兩朝)의 변무(辨誣)와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命)의 신원을 촉구하는 소를 올렸다가 사당(私黨)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다른 대간들의 비호에 힘입어 이듬해 다시 정언에 복관되었다. 그뒤 1733년 부수찬, 교리, 지평 등을 거쳐, 이듬해부터 1739년까지 지평, 교리, 수찬, 정언 등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1740년 예방승지를 거쳐, 이듬해 동의금(同義禁), 경기감사 등을 역임한 뒤 대사간이 되었다. 그뒤 호조,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1754년 대사간으로 재직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연(書筵)을 중지한 잘못과 조정의 언로폐쇄, 과거제의 문란 및 백관들의 기강의 해이함을 진계(陳戒)하는 소를 올려 인정을 받았다. 1758년에 동지돈령중추부사가 되고 1760년에 타계하였다. 벼슬에 있을 때 청백리로 알려져 깨끗한 선비라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초명은 필현(弼賢), 자는 정보(正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