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회이(晦而). 우의정 응인(應寅)의 후손으로, 영의정 사범(師范)의 아들이며, 익모(翼謨)의 형이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1728년(영조 4)에는 정언, 부수찬, 수찬, 부교리, 교리를 차례로 거친 뒤 영남안렴어사(嶺南按廉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강원도암행어사로 다녀와 울진현감 이식명(李植命)이 본도에 유배중인 민천효(閔天孝)를 매우 우대하고 있음을 보고하여 파직, 하옥하게 하였다. 또, 양역(良役)의 폐가 심함을 보고하고, 특히 폐가 많은 안협현감 신의집(申義集), 정선군수 송필환(宋必煥), 평창군수 최창억(崔昌億), 낭천현감 이도재(李道載) 등을 파직하도록 하였다. 철원부사 민사연(閔思淵), 고성군수 박필기(朴必琦), 전 안협현감 홍중기(洪重耆) 등을 선치수령(善治守令)으로 논상할 것을 진언하였다. 1732년 경성판관으로 있다가 돌아와 이듬해 응교, 집의를 거쳐, 1735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뒤 승지, 대사성, 예조참의,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745년에는 강화유수가 되어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강화성을 개축하는 등 방비를 튼튼히 하였으며, 1747년 대사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