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송병화(宋炳華)
  • 은진송씨(恩津宋氏),  출생~사망 : 1852 ~ 191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회경(晦卿), 영중(英仲). 호는 난곡(蘭谷), 약재(約齋). 조부는 통덕랑(通德郞) 월계당(月溪堂) 송윤문(宋潤文)이고, 부친은 통덕랑 송암(宋巖) 송조식(宋肇植)이다.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의 딸이다. 5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0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숙부 밑에서 학문을 익혔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흠모하여, 19살 때부터는 회덕(懷德) 남쪽, 우암이 기거했던 소재동에 자주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28살 때 처음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독서하던 연산에 가서 심암(心巖) 김지수(金志洙) 등과 더불어 강회에 참여하고, 전주의 이름난 학자인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과 교유하였다.이 무렵 재종질서(再從姪壻)인 임윤만(任潤萬)을 통해 그 부친이며 대학자인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그의 학문적 성취는 '난곡집(蘭谷集)'에 자세히 나와 있다. 벼슬보다는 학문을 통해 뜻을 펴고자 했는데, 여러 차례 벼슬의 나갈 기회도 있었다. 43세 때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있던 송병종(宋秉琮)이 양지임번(養志林樊)으로 추천하였고, 52세 때에는 참찬(參贊) 곽종석(郭鍾錫)이 경연에 주달하여 침랑(寢郞)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에 정릉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고, 그 다음해에 사관(史官)을 보내어 관복을 하사하며 부르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김지수와 함께 경연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세상을 통탄하며 더욱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16년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현재 대전시 동구 이사동에 있으며, 묘당(廟堂) 역시 이사동에 오적당(五適堂)이라는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