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형중(亨仲). 호는 낙운(樂耘).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윤(鈗)이다. 일곱살 때부터 글을 배워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 문리(文理)를 깨쳤으며, 1753년(영조 29) 사마시를 거쳐 그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서용되어 주서를 거쳐 전적에 올랐다. 1760년 2월 대간으로 너무 분운하게 고집한다 하여 제주목의 정의현(旌義縣)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5월에 풀려 돌아와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대신의 천거로 서용되었다. 그뒤 부교리, 헌납, 전적, 지평, 장령, 사간, 집의 등을 역임하고, 1776년(정조 즉위년)에는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를 다녀왔다. 이어 대사간, 승지, 형조참의, 호조참판,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794년 형조판서에 승진하고 공조판서, 대사헌,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1801년(순조 1) 윤행임(尹行恁)의 여당(與黨)이라는 심한 탄핵을 받아 벼슬이 삭탈되려 할 때에 죽어 화를 면하였다. 평소 기상이 엄숙하고 예절을 숭상하였으며,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가르치는 데 스스로 사표를 보여 가정을 바로잡았으며, 남의 과실을 탓하는 일이 없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해서를 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