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치복(穉福). 호는 고암(顧庵), 삼수(三守).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의 고손자로, 증조는 권형징(權泂徵)이고, 조부는 권세억(權世檍)이며,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권상형(權尙衡)이고, 생부는 신창현감(新昌縣監) 권상희(權尙熺)이다. 권구는 수학(數學)의 대가로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으며, 전처인 여주이씨(驪州李氏)는 천주교 신자로 순교한 판서 이가환(李家煥)의 딸이고, 일찍 상처하여 후처 기계유씨(杞溪兪氏)와 재혼하였는데 유한장(兪漢章)의 딸이다. 1795년(정조 19) 을묘식년사마시(乙卯式年司馬試) 생원(生員) 3등에 합격하였다. 예학(睿學)에 조예가 깊어 관혼상제(冠婚喪祭)의 규례를 엄격히 하였고, 특히 상제(喪祭)에 밝아 그 오류를 바로잡은 '상감잡록(喪感雜錄)', '상중답록(喪中答錄)' 등을 저술하였다. 평소에 입과 마음, 몸이 세 가지를 꼭 지킬 것을 다짐한다는 뜻에서 자신의 집을 삼수당(三守堂)라 지었다. 1847년(헌종 13) 64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공주(公州) 산내면(山內面) 무수동(無愁洞) 서대곡(徐台谷)에 묻혔다. 이씨와의 사이에는 일남이 있었고, 유씨에게서 권위전(權韋銓), 권재전(權載銓), 권경전(權敬銓) 삼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