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찬부(贊夫). 호는 외와(畏窩). 부친은 최종윤(崔宗崙)이며, 모친는 밀성박씨(密城朴氏) 박태진(朴泰鎭)의 딸이다. 수재로 알려져 있는데, 이미 7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고, 10세에 인(仁)이 되는 근본을 좌우명(座右銘)으로 적어두었는데, '효도의 효(孝) 자는 아들 자(子)에 나왔고, 공경할 제(悌) 자는 아우 제(弟)에서 나왔다. 글자는 다르지만 그 도리는 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1840년(헌종 6) 추천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제수되었다. 만년에 운문산(雲門山) 공암(孔巖)에 자리를 잡았는데, 배우려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성력(星歷), 병학(兵學), 기수(箕數)의 글에 모두 통달하였고, 자신의 위한 학문인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매진하였다. 문집으로 '외와집(畏窩集)'이 남아있다.이 책은 그의 증손 최임수(崔任壽)가 편찬하고 간행을 보지 못하고 죽자, 종손 최진수 등의 주선으로 1899년(광무 3)에 간행하였다. 문집의 내용 중 시는 대개 은일의 고고한 한가로움을 서술한 작품 등이고, 서(書)의 '상강재선생(上剛齋先生)'은 학자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위기지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국가적 차원에서의 도덕, 예악의 성쇠 여부에 따라 치란(治亂)이 반비례됨을 역사적인 사실을 들어 변증했다. 잡저(雜著) 중 '경의회정(經義會精)'은 '주역'의 건원형이정(乾元亨利貞)을 해설한 것으로, 정주(程朱)의 설을 토대로 학자가 지향할 바를 제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