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중화(仲和). 호는 나와(懶窩). 아버지는 정후(挺後)이다. 1763년(영조 39) 10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랐는데 1771년에는 정언이 되었다. 명종 때 유명한 성리학자인 기대승(奇大升)의 후예로서 대대로 전라도 광주에서 살았는데, 이 당시 그 후광을 입어 1782년(정조 6)에는 당상관으로 특별히 초자(超資)되어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으며, 계속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성격이 청렴하고 강직해서 1786년 대사간에 발탁된 뒤, 세번이나 연달아 이를 역임하다가 1792년에는 대사헌에 취임하여 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진력했다. 1795년에는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에 심취하여 관계서적을 조석으로 암송했으며, 이런 자세는 그의 조상인 기대승을 방불하게 하였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