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중우(仲羽). 호는 일휴정(逸休亭). 아버지는 참의 유겸(有謙)이며, 어머니는 윤홍유(尹弘裕)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36년(인조 14)병자호란이 일어나 11세의 어린 나이로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사신으로 간 이덕인(李德仁)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1648년 진사가 되고, 1655년(효종 6)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수찬, 응교 등을 거쳤다. 1667년(현종 8) 집의로 있을 때 청나라 조정이 청나라 도피인을 돌려보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조선에 책임을 물어 당시의 재상 들을 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지탄을 받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홍명하(洪命夏), 진주사(陳奏使) 허적(許積) 등이 그 책임을 오히려 왕에게 돌리자, 그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 맞서야 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크게 꾸짖고 처벌하도록 청하였다. 그는 당시에 이들을 파직시키기를 청하였던 김징(金澄) 등 7인과 함께 8간신(諫臣)으로 불렸다. 1669년 광주부윤(廣州府尹)을 거쳐 1672년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1675년(숙종 1)서인이 실각하자 한때 물러났으나 뒤에 재등용되어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687년 우의정에 올랐다. 대구의 상덕사(尙德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