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중시(仲施). 호는 척재(○齋). 숙종의 장인이며, 서인의 거두인 만기(萬基)의 손자이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진구(鎭龜)의 아들이다. 형은 춘택(春澤)이고, 종제로는 1721년(경종 1) 신임사화 때 노론의 사대신의 일파로 지목되어 거제에 유배되었던 복택(福澤)이 있다.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가 폐비되고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 등이 사사(賜死)되는 기사환국으로 집안이 크게 화를 입었는데, 아버지 진구가 섬으로 정배됨에 따라 형 춘택과 함께 섬에서 학문을 닦았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축출되고 송시열, 김수항 등이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는 등 서인이 집권함에 따라, 이듬해인 1695년 별시문과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노소분쟁으로 등용되지 못하다가 5년 뒤에야 연원찰방(連原察訪)으로 관직에 나가 검열, 정언 등 삼사(三司)의 요직을 역임했다. 1701년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처벌을 놓고 중형을 주장하는 노론과 경형을 주장하는 소론이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자, 형 춘택과 함께 소론의 영수인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을 호역죄(護逆罪)로 탄핵했으며, 역시 소론의 영수로서 스승인 송시열의 학문과 덕행의 결함을 지적했던 윤증(尹拯)을 배사죄(背師罪)로 논핵하였다. 세자시강원의 문학, 보덕 등을 거쳐 1715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노론의 선봉으로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문장은 물론, 글씨와 그림에 이르기까지 조예가 깊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