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민진형(閔震炯)
  • 여흥민씨(驪興閔氏),  출생~사망 : 1662 ~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중명(仲明). 위의 손자로, 정(挺)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두징(南斗徵)의 딸이다. 1686년(숙종 12)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89년 검열이 되고, 다음해 예문관봉교를 역임하였다. 이때 마침 강화에 있는 정족사고(鼎足史庫)에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인조실록'의 을유년 기사 40여자가 칼로 도려진 것이었다.이 기사는 봉림대군(鳳林大君)에 관한 내용인데이 일을 밝혀내는 소임을 맡은 적이 있다. 같은해 정언을 거쳐 1695년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접위관(接慰官)으로 동래부사 이희무(李喜茂)와 같이 대왜관계에도 진력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들의 검약생활에 관한 소를 올려 왕의 찬사를 받았다. 이해 또한 송시열(宋時烈)과 조광조(趙光祖)의 공형(共亨)문제에 관해서도 소를 올려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뒤 1697년 교리가 되고, 다음해 검토관(檢討官)을 역임하는 등 그뒤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