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덕표(李德標)
  • 여주이씨(驪州李氏),  출생~사망 : 1664 ~ 174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정칙(正則). 호는 우와(寓窩). 조부는 이교(李○) 이고 부친은 진사(進士)였던 이기(李○)이다. 기상과 도량이 호탕하고 넓어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덕망과 행실을 모두 갖추었다. 1699년(숙종 25) 기묘식년사마시(己卯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하였다. 1722년(경종 2)에 일어난 신임옥사(辛壬獄事) 때 장희빈을 신원하는 일로써 삼남(三南) 지방의 선비들이 대궐 앞에 나아가 소를 올리려 하였는데, 이 때 이덕표를 소수(疏首)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거듭 사자를 보내어 권하니 '내가 만약 끝내 나오지 않으면 이것은 화를 당할까 겁내어 인륜을 부지하는 큰 뜻에 불응하는 것이다. '하고 승낙하여 다시 상경하여 소(疏)를 올렸다. 그의 상소문은 수백 언(言)에 달했는데, 모두 인륜을 부지하고 간악한 무리를 배척하는 것들이었다. 당시 그의 심정은 '흰머리 드날리며 나라에 글 올리니, 일편의 충정과 임 그리는 마음뿐입니다'란 시구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1725년(영조 1)에 영사(領事) 민진원(閔鎭遠) 등의 탄핵을 받아 관서(關西)의 용천(龍川)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그는 태연하게 떠났으며 조금도 안색이 변함이 없었다. 이를 보고 지인(知人)들이 모두 애석하게 생각했는데, 참의(參議) 정간(鄭幹)이 그에게 시를 지어서 주길, '천 리의 관서로 가는 길 거듭 을사년을 만났구나. 이번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걸음인데, 어찌 눈물을 흘리겠는가'고 하였다. 1727년에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세상과의 접촉을 일체 끊고 경전을 깊이 탐구하면서 자연에 묻혀 여생을 보냈다. 1745년에 수직(壽職)으로 부호군(副護軍)으로 제수되었다. 저서로 '우와선생집(寓窩先生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