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서필원(徐必遠)
  • 부여서씨(扶餘徐氏),  출생~사망 : 1614 ~ 1671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아버지는 운기(雲驥)이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김집(金集)과 정홍명(鄭弘溟)에게 수학하였다. 1643년(인조 21)에 관직에 올라 창릉참봉, 사옹원봉사가 되었으며, 164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관을 거쳐 검열과 설서(說書)를 역임하고 1654년(효종 5) 부수찬이 되었으며 그뒤 헌납, 이조좌랑, 평안도어사가 되었다. 1656년 수찬을 비롯하여 지평, 교리, 이조정랑 등을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서원의 폐단을 보고하고 그 개혁을 청하였다. 1658년 대사간과 승지를 거쳐 전남도감사가 되었을 때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에 찬동하여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을 반포하였으며, 기민(飢民)을 구휼하기 위하여 왕대비의 삭선(朔膳)을 감할 것을 청하였다가 추고되었다. 1659년 진휼을 위하여 속미(贖米)를 받고 중죄인을 석방하였다가 파직당하였다. 현종 초년 병조참의, 승지, 대사성, 예조참의, 이조참의 등을 거쳐, 1663년(현종 4) 대사간, 승지,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목면재배를 권장하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특히 육진혁막제조(六鎭革○諸條)를 올려 그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는 데에 앞장섰다. 1665년에 강화유수가 되었고 그뒤 형조참판, 1669년 형조판서를 거쳐 1671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그해 죽었다. 민생을 구휼하고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실질적인 사업을 많이 하였다. 왕에게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이 나서 그 시대 이상진(李尙眞) 등과 함께 오직(五直)이라 불리었다. 저서로 '육곡유고'가 있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