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재수(再○). 호는 백화재(白華齋). 희(喜)의 10대손으로, 좌승지 진하(鎭夏)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진익(震○)의 딸이다. 1702년(숙종 28)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고, 박사, 병조좌랑을 거쳐 평안도사를 지냈다. 1709년 전라도사에 재직할 때에는 조세의 조운과정(漕運過程)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엄격히 단속하였고, 1711년 무안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거듭된 흉년으로 피폐해진 농민들의 구휼에 힘썼다. 어사 홍석보(洪錫輔)가 그의 치적을 조정에 주달하여 포상이 내려지고, 나주조군의 통솔권을 받았다. 그뒤 사헌부장령, 영광군수를 거쳐 1728년(영조 4) 통정(通政)에 올라 종성부사가 되었다. 이때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과 영남안무사 박사수(朴師洙)와 함께 청주에 이르러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도리어 적도들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구성에 유배되었다. 7년 뒤인 1736년에 사면되어 복직의 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향리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상주의 봉산사(鳳山祠)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화재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