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원중거(元重擧)
  • 원주원씨(原州元氏),  출생~사망 : 1719 ~ 179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재(子才). 호는 현천(玄川), 손암(遜菴), 물천(勿川). 조부 원덕형(元德亨)은 포의로 생을 마쳤다. 1719년(숙종 45) 9월 21일에 원태규(元泰揆)의 7남 1녀 가운데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태규는 1699년(숙종 25) 기묘증광사마시(己卯增廣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사직령(社稷令)을 지냈다. 원중거는 1750년(영조 26) 경오식년사마시(庚午式年司馬試)에 생원 2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10여 년간 실직(實職)을 제수 받지 못하다가 40세가 넘어서야 장흥고봉사(長興庫奉事) 라는 종8품에 보임되었다. 1763년(영조 39)에 계미통신사의 서기로 사행을 다녀온다. 1770년(영조 46)에 종 6품의 송라도찰방(松羅道察訪)으로 승직되었다. 그러나이 관직은 60일 만에 교체되었다. 그는 송라도찰방을 그만 둔 뒤에 가난에 쪼들리게 되었고, 결국 선영이 있는 용문산 아래에 은거하였다. 그는 1776년(영조 52) 무렵에 장원서주부(掌苑暑主簿)를 맡게 되었다. 그는 장원서 주부로 있으면서 '해동읍지(海東邑誌)'의 편찬에 연암 그룹의 인물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는 1790년(정조 14)에 죽었다. 그는 이덕무(李德懋), 성대중(成大中),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홍대용(洪大容), 황윤석(黃胤錫), 남공철(南公轍), 윤가기(尹可基) 등과 교유하였다. 원중거는 옛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고 세속의 명리와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기질과 지사적인 삶은 연암그룹의 젊은 지식인들로부터 존장으로 인식되어 존경을 받았다. 그는 또한 시인으로 뛰어난 역량을 보였는데, 그의 시는 성당(盛唐)의 넉넉한 시풍과 청신한 시어를 특징으로 하였다. 시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결국 그를 통신사행의 서기로 일본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는 그곳의 여러 문사들과 교유하는 한편 많은 문인지식인들과 시문이나 필담을 통해 그곳의 학술과 문예를 인식할 수 있었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들을 단순히 섬나라 오랑캐로 야만시 할 수 없다는 자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사행의 일원이었던 조엄(趙○)이 당시 일본의 문화와 학술에 대하여 '일본의 학술은 긴긴 밤이라 해도 좋으며, 일본의 문장은 소경이라 할 수 있다.'고 부정적이었던 것에 비하면 원중거의 시각은 매우 예리한 안목이었다고 할 만하다. 당시의 일본은 장기도(長崎島)를 통해 중국과 서양의 문물이 폭주하고 있었고, 이러한 새로운 지식과 견문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산업사회로 약진할 발판을 마련하고 있던 때였다. 원중거는 당시 대판성(大坂城)의 웅장하고 번화한 모습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고, 그들의 풍부한 물산이나 편리한 기용 등에 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원중거의 자세한 견문은 연암 그룹의 문인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학술과 문예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물론 박제가 나 이희경(李喜經)이 그들의 이용후생의 저술에, 일본의 도자기나 수차, 궁실 등의 제도를 소개한 것은 바로 원중거의 견문에 힘입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그가 저술한 '화국지(和國志)'와 '승사록(乘○錄)'의 의의는 매우 크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