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여(李畬)
  • 덕수이씨(德水李氏),  출생~사망 : 1645 ~ 1718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삼(子三) 또는 치보(治甫). 호는 포음(浦陰) 또는 수곡(睡谷). 이조판서 식(植)의 손자로, 시정(寺正) 신하(紳夏)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후완(辛後完)의 딸이다. 1662년(현종 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80년(숙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다음해에 홍문록(弘文錄)에 등재되고 정자가 되었다. 이어서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고, 박사, 수찬을 거쳐 1683년 암행어사로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이후 헌납, 이조좌랑, 이조정랑, 부응교, 집의, 사간 등을 역임하고, 1685년 승지에 발탁되었다. 이어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 대사간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694년 중궁복위 및 갑술환국에 적극 참여하여 형조참판에 발탁되었고, 다음해 도승지를 거쳐 이조참판이 되었는데, 이때 재해로 인한 농촌피폐에 대한 수습책을 상소하였다. 이어서 공조참판, 한성판윤, 대사헌, 좌참찬, 대제학, 예조판서,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702년 좌의정이 되었고, 곧 영의정에 승배(陞拜)되었다. 도성수축 및 과거제문란 등을 둘러싸고 최석문(崔錫文)과 대립하다가 패배하여 1707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자 여주에 은거하였다. 왕이 사관(史官), 승지 등을 계속 보내어 불렀으나 끝까지 응하지 않고 죽었다. 약관(弱冠)부터 문명이 높았다고 하며, 재직중에는 농정(農政), 재해(災害), 진민(賑民) 등에 대한 소를 자주 올렸다. 또, 평소 당론(黨論)의 화를 걱정하였고, 과격하지 않았으며,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나 몸가짐을 조심하여 거처가 누추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