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경(子敬). 증조부는 관찰사를 지낸 김치후(金致○)이고, 조부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청천군(淸川君) 김종정(金鍾正)이며, 부친은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내고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된 김명연(金命淵)이다. 모친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남홍억(南洪檍)의 딸이고, 처부는 이희곤(李羲坤)의 딸이다. 1830년(순조 30)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으나 때마침 부친상을 당하여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1832년에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를 거쳐 오위사과(五衛司果),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등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임실현감(任實縣監), 영천군수(永川郡守), 광주부판관, 담양부사(潭陽府使), 안주목사(安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850년(철종 1)에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공조참의(工曹參議), 호조참의(戶曹參議),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오위장(五衛將),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860년(철종 11)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官), 공조참판(工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고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에 차임되었다. 1862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가 되었고, 1864년(고종 1)에 가의대부(嘉義大夫)로 가자(加資)되었고, 1866년에 병조참판(兵曹參判)과 공조판서(工曹判書), 1867년에 지돈령부(知敦寧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사후인 1868년에 좌찬성(左贊成)과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다. 묘는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에 있다. 아들 김학성(金學性)은 1829년(순조 29)에 기축정시문과(己丑庭試文科) 병과(丙科) 14등으로 급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