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일여(一如). 사육신 팽년(彭年)의 후손으로, 광주(光胄)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현감을 지내다가, 1784년(정조 8)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부교리, 영월부사(寧越府使), 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1799년(정조 23)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같은해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가 태조가 말달리기를 하던 곡산(谷山)의 치마도(馳馬道) 옛터를 고증하여 많은 칭송을 듣기도 하였으나, 칙수미(勅需米: 중국 칙사를 대접하기 위하여 사신이 지나는 驛路에 두는 쌀)의 관리를 소홀히 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전직 감사들과 함께 파직되었다. 한편, 1796년 왕명으로 이의준(李義駿),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장릉지 莊陵志'를 교정하여 '장릉사보 莊陵史補'를 편찬하였다. 그는 정조 로부터 사육신의 후예라는 총애를 받아 영월부사와 참판 등에 특별히 제수받는 영광을 누렸으며, 글씨에도 조예가 깊어 장릉영천비(莊陵靈泉碑), 관풍헌중수기(觀風軒重修記), 육신사기(六臣祠記) 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