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인수(仁○). 호는 지산(地山). 형조판서 계원(啓遠)의 손자로, 우의정 사석(師錫)의 아들이며, 태구(泰耉)의 형이다. 1696년(숙종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 문학, 정언을 거쳐 암행어사로 분견(分遣)되어 각도를 염찰(廉察)하였다. 1699년에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며, 부교리, 교리, 수찬, 헌납, 이조좌랑 겸 사선, 응교, 겸필선, 집의를 거쳐 1703년 보덕으로 병 때문에 위소(違召)하여 파직되었다. 1706년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고, 승지로서 암행어사 시에 공론(公論)을 채취하여 별단(別單)으로 서계(書啓)하여 국가를 위하여 죽은 전망인(戰亡人)들을 포충(褒忠)하여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대사성, 이조참의, 개성유수를 거쳐 부제학으로 관료선발에 문벌을 중시하고 색목(色目)에 구애되어 편용(偏用)의 풍습이 많으니 이를 고쳐 수재제품(隨才題品)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강화유수로서 강도사절인(江都死節人)을 배향한 충렬사(忠烈祠)의 외영(外楹)을 증수하고 통진(通津)을 총융사로부터 강도(江都)에 속하게 하며 난 후 강화도의 민호(民戶)가 적고 논이 많으나 모민(募民)의 실효가 없으니 목장을 설치하자고 건의하였다. 평안도관찰사로서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부사가 되었으나 서로(西路)의 진사(賑事)가 염려된다는 이유로 그대로 평안감사에 머물렀으며, 도내의 행의탁이(行誼卓異)한 자 중에서 더욱 뛰어난 자는 정려하고 그 다음은 복호(復戶)와 동시에 차등있게 사물(賜物)하며 당아산성(○○峨山城)을 수축해서 양계(粮械)를 쌓아 일별장(一別將)을 보내어 방비하도록 하자고 상소하였다. 1717년 평안도관찰사로서 감영에서 죽으니 임금이 담군(擔軍)을 주어 호송하도록 명하였다. 장신풍간(長身豊幹)하고 충후관위(忠厚寬偉)하여 사람들이 장자(長者)라고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