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인백(仁伯). 호는 노암(魯庵). 뒤에 이름을 희운(羲運)으로 바꾸었다. 안동 출신. 복호(復浩)의 아들이다. 남인이면서도 같은 남인들이 신봉하는 천주교에 적대적인 공서파(攻西派)에 속하였다. 1787년(정조 11) 이승훈(李承薰)과 정약용(丁若鏞) 등이 성균관 근처 반촌(泮村)의 김석태(金石太) 집에 모여 천주교 서적을 강습한다는 것을 이기경(李基慶) 으로부터 전해 듣고 이들을 고발하여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을 일으켰다. 1790년 증광문과에서 크게 만연하게 될 사학(邪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답안을 써서 병과로 급제, 가주서가 되었다. 이듬해 전라도 진산에서 정약용의 외종이 되는 윤지충(尹持忠)이 천주교 의식에 따라 어머니 권씨의 상장(喪葬)에 예를 지키지 않았으며, 더구나 외제(外弟)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죄인의 체포와 가택수색을 요구하였고, 당시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에게는 사학의 무리를 섬멸하라고 재촉하여 신해진산사건(辛亥珍山事件)을 일으켰다. 사건의 확산을 바라지 않았던 채제공이 윤지충과 권상연의 처형으로 마무리지으려 하면서 '형상을 포착할 단서가 없는데도 모함할 마음으로 서학을 하였다고 몰아붙이면 세상도리에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 하고 정조에게 간하자, 정조도 모함에 대해서는 엄하게 처단하라고 하였다. 물의를 일으킨 탓으로 가주서 자리에서도 물러난 그에게 모함이 아니라는 구체적 증거를 계속 요청하자, 그는 권일신(權日身), 이승훈 등을 천주교 두목이라고 지적하여 신문을 받게 하였다. 권일신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유배길에서 죽고, 이승훈은 그의 고발이 모함이라고 자신을 변호하여 석방은 되었으나 평택현감의 관직이 박탈되었다. 그의 만년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달레(Dallet, C. C.)에 의하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주도로 귀양가서 20년 후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또한, 아들 원모(元謨)도 기해교난 때 천주교를 박해하다가 경원으로 귀양갔다고 전하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