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정홍순(鄭弘淳)
  • 동래정씨(東萊鄭氏),  출생~사망 : 1720 ~ 178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의중(毅仲). 호는 호동(瓠東). 영의정 태화(太和)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참판 석삼(錫三)이다. 1745년(영조 2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설서, 이조정랑, 지평, 교리, 이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고, 호조판서로 10년간 재직하면서 재정문제에 특히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 제일의 재정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1762년 호조판서로서 예조판서를 겸하여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상(喪)에 장의(葬儀)를 주관하면서, 장헌세자의 의복과 금침에서부터 악모대리(幄帽帶履) 등 미세한 것까지 한쪽씩 떼내어 그때의 문부(文簿)와 함께 봉하여 수자(守者)를 단속하고 이를 보관하였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한 다음해에, 앞서 세자의 장례 때 상례의 풍부 여부를 알고자 당시 예조판서 였던 그를 대령하게 하므로, 그는 곧 서리를 시켜 당시 간직하여두었던 것을 내어다 보이자, 정조는 부장품이 풍부하고 예에 빠진 것이 없음을 보고는 매우 가상히 여겨 곧 우의정에 제수하였으며, 이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승이 된 뒤에도 미세한 일에까지 검소와 절약으로 일관하여, 어느 때인가 자기집을 수리할 때 공인(工人)과 더불어 일삯으로 서로 다툰 일이 있었다. 이를 본 그의 아들이 '어른의 신분으로 천한 공인과 노임을 가지고 다투는 것은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 아닙니까○'하니, 그는 '정승은 한 나라의 의표(儀表)인데, 내가 삯을 과히 주면 온 나라의 예가 되어 빈한한 백성들이 많은 곤란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또, 한때 그에게 파전(破錢)한푼이 있었는데, 사람을 시켜 땜질하여 붙이는 데 두푼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두푼을 들여 한푼을 얻으면 오히려 한푼이 손해가 나는데 어째서 공은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나 개인은 한푼을 잃었어도 나라에는 한푼이 이익이 되니 어찌 이익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의 도량에 탄복하였다 한다. 시호가 정민(貞敏)으로 내려졌다가, 뒤에 충헌(忠憲)으로 개시(改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