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조세환(趙世煥)
  • 임천조씨(林川趙氏),  출생~사망 : 1615 ~ 168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의망(○望). 호는 수촌(樹村). 아버지는 참봉 석(碩)이며, 어머니는 별좌(別坐) 이거인(李據仁)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시에 능하였고, 1633년(인조 1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637년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하고, 또 1644년에 북경이 청군에 의하여 함락되고 명나라 의종(毅宗)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벼슬에의 뜻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1657년(효종 8)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전적이 된 뒤 예조와 병조의 좌랑, 황주판관, 병조정랑을 거쳐 정언, 지평, 장령 등의 언관을 지냈다. 1670년(현종 11)에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집의, 사간, 무주부사, 고성현감 등을 거쳐 대구부사로 있을 때 부패를 일소하고 절의를 권장하였으나 오히려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자된 뒤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왕이 그의 가난함을 걱정하여 특별히 금품을 하사하였으나, 이를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 왜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한 송상현(宋象賢)의 사당을 중수하는 데 사용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 관노로 순국하였던 석매(石邁)의 자손들을 모두 천적에서 삭제하여 주었다. 그리고 상고세(商賈稅)를 공정하게 거두어 많은 액수를 호조에 보냈으며, 또 자신의 봉급으로 가난한 백성들의 세금을 대납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에 오른 뒤 승지,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83년 승지로 있다가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으나, 왕의 병환소식을 듣고 풍설(風雪)을 무릅쓰고 상경하던 도중 신창(新昌)에 이르러 갑작스런 병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