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원례(元禮). 호는 봉헌(奉軒). 수찬 효수(孝修)의 아들이며, 이조판서 유린(有隣)의 동생이다. 1768년(영조 44)에 진사가 되어 음보로 교관(敎官)을 지내다가 1772년 별시 탕평과(蕩平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응교 등을 역임하다가 정조가 즉위하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1778년(정조 2)에 대사간의 자리에 있을 때에 '속명의록 續明義錄'을 언해(諺解)하여 8도에 반포하게 하였다. 그뒤 이조참의, 승지,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등의 요직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으며, 1782년에는 규장각직제학에 임명되었고, 1783년에 개성유수로 있을 때에 두문동태학생(杜門洞太學生) 72인 가운데 3인을 개성부 숭절사(崇節祠)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1785년에 이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하였고, 1788년에 한성부판윤, 1792년에 형조판서, 사역원 및 장악원의 제조(提調)를 역임하였다. 1792년에 홍명호(洪明浩)가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될 때에 함께 고신(告身)을 삭탈당하였으나 곧이어 사면을 받아 이조판서, 병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거쳤다. 1794년 검교직제학(檢校直提學)으로 있다가 제학(提學) 정민시(鄭民始) 등 10인과 함께 고양(高陽)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부사직(副司直)의 자리에 올랐으며, 1795년에 두번째로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그해에 진하사(進賀使)의 부사로서 북경을 다녀왔다. 1797년에는 강원도관찰사로서 간성의 인구동태를 조사하여 '간성유민환접타민이접성책 杆城流民還接他民移接成○'을 지어 올렸다. 삼사의 장(長)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고, 전관(銓官)을 맡아보는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치면서 정조 때에 권력의 중추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서도에 능하였는데 1785년에 쓴 규장각 상량문 등의 글씨가 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