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박종보(朴宗輔)
  • 반남박씨(潘南朴氏),  출생~사망 : 1760 ~ 1808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신(汝臣). 판돈령부사 준원(準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이조참판 원경유(元景游)의 딸이다. 1787년(정조 11) 누이가 수빈(綏嬪: 순조의 생모)이 되자 음보(蔭補)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등용되고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의빈부(儀賓府)와 충훈부(忠勳府)의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178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정조의 아들이 태어나자 임금의 명에 따라 궁중에서 보육의 책임을 맡았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할 때, 왕의 몸을 보호하는 근척(近戚)이 측근에 있어야 한다고 하여 임금의 외숙으로서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공조참의가 되고, 임금이 천연두를 앓을 때 입직한 공로로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803년 형조참판을 거쳐 성천부사(成川府使), 춘천부사(春川府使) 등을 역임하고, 1806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사도시제조(司○寺提調)가 되었다. 이때 대신들의 천거를 받아 호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음관(蔭官)이 단천(單薦)으로 호조판서가 된 것은 유례가 없다.'고 세 차례나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비변사당상으로 경질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정조 로부터 '비록 음관으로 벼슬에 올랐지만 풍도(風度)는 문신과 같으니 후일 마땅히 재상이 될 것이다. '라는 평을 받았다. 여러번 과거에 떨어졌으나 태연하였고 초년에 빈한하게 살았기 때문에, 높은 관직에 올라 녹봉이 많아지자 즐겨 남을 도와주었으며, 서예에도 재능이 있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