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시온(時○). 호는 추월(秋月). 증조부는 남명핵(南溟○), 조부는 진사(進士) 남석(南晳)이다. 1722년(경종 3)에 전주(全州) 비래천(飛來川)에서 진사(進士) 남도혁(南道赫)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안동김씨 통덕랑(通德郞) 김추건(金秋健)의 딸이다. 형제는 위로 생원(生員) 남규(南圭)와 아래로 찰방(察訪) 남중(南重)이 있다. 1740년(영조 16) 19세 때 홍천에서 유채(柳綵)의 딸과 혼인하였고, 유씨와 사별한 후 찰방 창원황씨 황수정(黃壽鼎)의 딸과 재혼하여 슬하에 남려(南○)와 남개(南○)를 두었다. 남옥은 1740년(영조 16) 19세 때에 해주에 가서 과거 공부를 하고, 그 다음해에는 춘천으로 갔다가 한 해 뒤에 강릉으로 거처를 옮기는 등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1746년(영조 22)에 그는 원경하(元景夏)의 진언에 따라 매문(賣文)의 죄목으로 안악에 정배되었다가 이듬해 여름에 사면되었다. 그는 1753년(영조 29)에 계유정시문과(癸酉庭試文科)에 병과 4등으로 합격하였다. 1762년(영조 38)에 조재호(趙載浩)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그 해 8월에 좌의정(左議政) 홍봉한(洪鳳漢)의 주청으로 유배에서 풀려났다. 1763년(영조 39)에 8월 3일에 계미년 통신사행의 서기(書記)로 일본을 향하여 떠났다가 다음해 7월 8일에 복명(復命)하였다. 1764년 수안군수(遂安郡守)에 임명되었다. 1770년(영조 46)에 최익남(崔益男)의 옥사 때 이봉환(李鳳煥)과 친하다고 하여 투옥되어 5일 만에 매를 맞아 죽었다. 남옥은 김광치(金光熾), 최익남(崔益男), 이봉환(李鳳煥), 이정보(李鼎輔), 이민보(李敏輔), 이홍상(李鴻祥), 이양정(李養鼎), 유경창(柳景昌), 어용빈(魚用賓), 채희범(蔡希範), 박경행(朴敬行) 등과 교유하였다. 그의 문학세계의 전반적인 특징은, 김창흡(金昌翕)과 육유(陸游)의 시세계를 추종하였고 서정성이 강한 시를 지었으며, 문에 있어서는 당송고문의 경향을 띄었다. 남옥은 1763년에 계미 통신사의 서기(書記)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오게 되는데, 이때 '일관시초(日觀詩草)', '일관창수(日觀唱酬)', '일관기(日觀記)' 등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이 기록물들은 '해행총재(海行摠載)'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조엄(趙○)의 '해사일기(海○日記)' 보다 훨씬 더 상세하고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관기'의 좌목(座目), 노정(路程), 공대(供待), 수창제인(酬唱諸人) 등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상, 한일양국간의 문학적 교유 등을 살피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그는 위에 열거한 책 말고도 '할반록(割○錄)' 1책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