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사관(李思觀)
  • 한산이씨(韓山李氏),  출생~사망 : 1705 ~ 177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숙빈(叔賓). 종성부사 기성(基聖)의 아들이며, 기한(基漢)에게 입양되었다. 1729년(영조 5)진사시에 합격하고, 1737년 통덕랑으로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승문원에 들어갔다. 1747년 정언으로 청요직(淸要職)에 발을 들여놓은 뒤 2년 후 지평, 사서 등을 역임하였고, 1759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직전 논란이 있어 황주목사로 파견되었다가 결국 1762년 다시 충청감사가 되었다. 그 이듬해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천거로 병조참판으로 탁용되었으며 도승지를 거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뒤 호조, 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일시 한성부좌윤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판서, 호조판서를 지냈다. 1772년에는 문소전(文昭殿)의 옛터에 새로이 비각을 건립하는 데 공이 있다 하여 가자되었고, 그해 10월 우의정에 오르고 다시 좌의정으로 승배(陞拜)되었다. 그뒤 무고를 받고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판중추부사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으며, 1774년 벼슬을 떠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듬해 병으로 영중추부사의 한직을 맡았다가 영조가 은퇴하고 세손(世孫: 정조)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다시 우의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던 중 등청하다가 쓰러져 죽었다. 영조는 직접 제문을 지어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문장에 매우 능하였고 글씨도 뛰어났다고 하지만, 사신(史臣)은 그가 문식(文識)이 있고 평소 명망도 높았으나 재상에 올라 일을 크게 처리하지 못하였다 하여 반식재상(伴食宰相)으로 적고 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