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중(成仲). 호는 부재(孚齋). 예조판서 집(緝)의 아들이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병과 2인으로 급제, 관도에 나갔다. 1716년 부제학 유봉휘(柳鳳輝)가 홍문록(弘文錄)을 작성할 때 서명균(徐明均) 등 16인과 함께 선발되어 기록되었으며, 곧 김재로(金在魯), 이진망(李眞望) 등과 더불어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해에 홍문관수찬에 보임되었는데,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 부자를 규탄하는 향유(鄕儒) 신구(申球)의 상소가 있자, 이를 '조의제문 弔義帝文'을 주석한 유자광(柳子光)의 음모와 같다고 통박하면서 윤증을 두둔하고 신구에게 죄줄 것을 상계하였다가 영의정 김재로 등이 사화를 일으킬 언동을 함부로 한다고 탄핵하여 삭출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