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백(成伯). 첨지중추부사 순(淳)의 아들이다. 1657년(효종 8) 사마시를 거쳐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63년 주서가 되고, 1667년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나 관찰사 민점(閔點) 과의 반목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지평에 기용되어, 1669년 정언에 올라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을 무고한 서필원(徐必遠) 등과 논쟁을 벌여 물의를 일으켰다. 부마의 집들이 제도에 벗어나며 호화로워짐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1671년 헌납이 되었다가 배천군수로 나갔으나 지평 정유악(鄭維岳)의 탄핵을 받아 체차(遞差)되었다. 뒤에 장령으로 다시 기용되어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이 일자 조경(趙絅)의 현종묘정(顯宗廟庭) 출향(黜享)과 오시수(吳始壽)의 정법(正法)을 역청(力請)하였다. 그 뒤 안변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세력이 꺾이자 송추(松楸)에 은거하였다. 다시 갑술옥사로 서인이 세력을 만회하자 1695년 승지가 되어 임경업(林慶業)의 부인 정표(旌表)를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1699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