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래(聖來). 아버지는 영의정 상철(尙喆)이다. 음보(蔭補)로 참봉에 기용되어 1772년(영조 4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779년(정조 3)에 부수찬이 되어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이때 내의원 액예(掖隷)들이 약재를 징발하고 의관들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 등의 작폐를 논하고 엄히 치죄할 것을 건의하였다. 1780년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을 역임하고 1782년 행수선전관(行首宣傳官), 승지를 거쳐 1783년 대사성, 이조참의, 광주유수(廣州留守) 등을 역임하였으며, 그뒤 1786년까지 이조참의와 대사성을 지냈다. 1779년에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은 정조가 후사가 없자, 정조의 동생 은언군(恩彦君) 인의 아들 완풍군(完豊君) 담(湛)을 후사로 삼으려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반역죄로 몰아 살해하게 하였는데, 평소 담과 친하여 그의 혼인 때 혼수를 보내 도운 사실이 뒤늦게 문제가 되어 담의 역모와 관련, 추국(推鞫)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791년(정조 15) 부친상을 당하여 풀려났다가 치상(治喪) 후 교동(喬桐)으로 이배되었다. 1830년(순조 30) 손자 긍창(兢昌)의 탄원으로 신원되어 그 관작이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