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상오(相五). 중영(重英)의 손자이며, 서령(署令) 익창(翊昌)의 아들이다. 1699년(숙종 25) 직장(直長)으로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713년 중국사신이 되돌아갈 때 평양에 머무르면서 대접소홀을 문제삼아 행패를 부리자 중로문안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승지가 되었다. 그뒤 계속하여 왕의 측근에서 승지로 왕을 보필하였다. 1718년 여주목사로 나갔는데, 이때 사헌부 로부터 재물을 탐한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듬해 다시 승지가 되어 중앙으로 돌아온 뒤 1721년(경종 1) 분병조참의가 되었다. 이해 노론이 왕세제(王世弟: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소론 조태구(趙泰耉), 유봉휘(柳鳳輝) 등과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는이 일로 노론의 강력한 반발을 받아 절도에 위리안치하라는 대간들의 탄핵이 있었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해 공조참의가 된 뒤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