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휘(士輝). 호는 긍재(肯齋). 판서 정만(正萬)의 아들이다. 1719년(숙종 45)에 생원시에 장원이 되었고, 1725년(영조 1)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7년 정언으로 기강확립을 위한 소를 올리고, 교리가 되어 당론을 일삼는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1729년 수찬으로 복직된 뒤, 헌납, 교리, 지평 등을 거쳐 이듬해 승지로 발탁되었다. 1732년 가자되어 병조참판을 지내고, 도승지가 되었을 때 그는 영조 로부터 '노론과 소론의 당쟁은 실은 숙종이 죽을 무렵 신하가 군주를 선택한 데 있다(實由乎庚子 國恤之日 此頃者所謂 臣擇君者也).'고 한 수서(手書)를 받기도 하였다. 그해에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命) 등 노론대신의 신원(伸寃)을 상소하여 관작을 복구하게 하였다. 이어 대사성, 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에 전임하여 유생의 건복(巾服)을 청나라 제도에 따르도록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고, 이후 다시 대사헌, 대사성을 거쳐 형조참판이 되어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이어 경기감사 재임중 파직되었다. 1736년 서용되어 도승지, 대사헌, 한성부우윤을 지내고 강화유수가 되어 임지에서 죽었다.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성품이 당론에 치우쳐 공정하지 못하였다는 평이 많았다.